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(문단 편집) === 자녀 === || '''자녀''' || '''이름''' || '''출생''' || '''사망''' || '''배우자 / 자녀''' || ||<|2> '''1녀''' ||<|2> [[엘리자베트 마리|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]][br]{{{-2 (Elisabeth Marie, Princess Otto of Windisch-Graetz)}}} ||<|2> [[1883년]] [[9월 2일]] ||<|2> [[1963년]] [[3월 16일]] || --빈디쉬그라츠의 오토 공--[br]슬하 3남 || ||<#FFF0F5> 레오폴트 페츠네크[br]슬하 1녀 || ||[[파일:Archduchess_Elisabeth_Marie_of_Austria.jpg|width=100%]]|| || 엘리자베트 마리 여대공 || 아내 [[벨기에의 스테파니]]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정식 이름은 '''[[엘리자베트 마리|엘리자베트 마리 헨리에테 스테파니 기젤라 "에르치" 폰 외스터라이히]]'''다. 엘리자베트 마리는 특이하게도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[[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]] 당원으로 입당하여 사회주의자로 인생을 살았다.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'''붉은 대공비''' 또는 '''붉은 황녀.''' 엘리자베트 마리는 인생사가 참으로 다이나믹한데 '''[[https://de.wikipedia.org/wiki/Otto_zu_Windisch-Graetz|오토 추 빈디슈그래츠 남작]]'''에게 반해서 결혼시켜 달라고 했는데, 이 오토라는 남자는 [[약혼자]]도 있던 사람이라 당연하게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령에 의해 반강제로 결혼한 엘리자베트를 사랑하지 않았다. 오토는 대놓고 [[창녀]]와[* 마리 지글러라는 사람으로 오페라 가수라는 설도 있다.] 바람을 피우는 등 아내의 심기를 뒤집어놨고, 결국 엘리자베트는 이혼 신청을 하게 된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 때 적십자 간호부로서 병사들을 간호하는 역할로 모범을 보였으며, 오토와 이혼하고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까지 망하면서 잠시 굶기도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. 이때 자녀들의 양육권 분쟁이 있었는데 사실 오토나 엘리자베트나 둘 다 딱히 아이들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[[트롤링|서로를 엿먹이기 위해]] 이혼소송이 걸리게 된다. 이때 사회민주당원들이 이혼 소송에서 도와줘서 사회당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직접 입당, 연애도 [[https://de.wikipedia.org/wiki/Leopold_Petznek|레오폴트 페츠네크]]라는 평민 사회주의자와 했다.[* 페츠네크는 심지어 고아였다. 즉 오스트리아 제국이 살아 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결혼인 셈.] 귀천상혼으로 고생한 [[프란츠 페르디난트]]를 생각하면 아이러니. 정작 연애기간에 비해 결혼이 늦었는데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페츠네크가 [[다하우]] [[수용소]]로 끌려가서 결혼은 만나고 한참 뒤인 27년 후 1948년에 했다고 한다. 이후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. 더 자세한 인생사는 [[엘리자베트 마리]] 문서로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